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몽학의 난 (문단 편집) == 반란 진행 요약 == 이몽학의 아버지는 이몽학을 집에서 내쫓아버렸다. 집에서 쫓겨나서 떠돌이로 지내던 이몽학은 한현의 부하로 들어가 그곳에서 [[반란]]을 일으킬 마음을 품게 된다. 이후 의병을 모집한다는 명분으로 '동갑회'라는 조직을 만드나, 실은 이곳에서 반란을 위해 군사 훈련을 하였다. 1596년 7월 30일, 이몽학의 군대는 충청도 홍산과 임천(현 부여군)에서 군수와 현감을 사로잡은 후, 8월 2일까지 청양과 예산까지 함락하고 8월 3일 [[홍주성]](현 [[홍성군]])을 포위했다. 당시의 정황을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몽학은 종성(宗姓)의 서족으로서, 호서(湖西)에서 종군할 적에 조련 장관(操練將官)이 되어 홍산 무량사(無量寺)에 우거하면서 선봉장 한현(韓絢) 등과 친교를 맺었다. 몽학은 어리석고 아무 재능이 없었으나 한현은 교활하고 일에 밝았다. 당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을 가지고 군사를 배치하고, 기량을 훈련시켰는데 한현은 권인룡(權仁龍)·김시약(金時約) 등과 함께 모두 서인으로 응모하여 함께 선봉장이라 호칭하면서 어사 이시발(李時發)에 소속되어 호서의 군사조련을 관할하였는데 민심은 탄식과 원망으로 차 있었고 크고 작은 고을에 모두 방비가 없음을 보고 이 틈을 타서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때 현이 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홍주(洪州)에 있다가 우선 몽학을 시켜 거사하도록 하고 자신은 내포(內浦)에서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을 정하였다. 몽학은 무량사의 굴속으로 잠입하여 중들과 더불어 기치(旗幟)와 기장(器杖)을 만들었다. 호서의 풍속에 흔히 늘 동갑회(同甲會)를 만들었는데, 이에 그 패거리를 시켜 계(契)를 만든다고 선전하고 동네 어귀 들판으로 모이게 했다. 【갑회(甲會)란 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동갑마다 깃발을 세우고 그 갑년을 써 놓으면 무리들은 각자 그 동갑을 찾아 모여 들어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것이다.】 몽학은 절에서 출병(出兵)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깃발을 세우고 걸상에 앉아 각(角)을 불고 북을 치면서 큰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동갑 모임 중에서 공모한 장정이 먼저 나와 칼을 뽑아 들고 무리를 데리고 달려나갔다. 몽학은 그들에게 속임수로 꾀기를 ‘이번에 일으킨 의거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이다. 거역하는 자는 죽음을 당할 것이고 순종하는 자는 상을 받으리라.’고 하니 모두들 좋다고 떠들면서 그를 따랐으며, 사람마다 스스로 고관대작이 될 것으로 여기고 성불(聖佛)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승려와 속인을 장군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문관과 무관 등의 청현직으로 가칭하니 사족 자제와 무뢰배들이 많이 그들에게 붙었다.''' 그날 밤에 홍산현(鴻山縣)을 습격하여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고 【영현은 무자년에 생원시에 장원하여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어 광해군(光海君)이 그에게 배웠으며 그 뒤에 지금의 관직으로 전직되었다.】 또 임천 군수(林川郡守) 박진국(朴振國)을 【문과 출신이다.】 사로잡았다. 다 항복하여 몽학에게 붙으니 상빈(上賓)으로 대우했다. 잇따라 청양(靑陽)·정산(定山) 등 6개 고을을 함락시켰다. '''수령들은 모두 먼저 도망치고 아전과 백성들은 적들의 호령에 따랐고 술과 음식을 차려서 맞이하였으며 군사를 뽑아 그들에게 가세하였다. 이에 소문만 듣고도 호미를 던지고 그들에게 투항하는 자가 줄을 이어 군사가 수만 명에 달하자''' 소문을 퍼뜨리기를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과 의병장 곽재우(郭再祐)·홍계남(洪季男)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도우며,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이 내응한다.’ 하니, 중외(中外)가 놀라 민심이 술렁거렸다.[* 《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7월 1일 병인 1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홍주목사 홍가신은 관속 이희수를 시켜 거짓 항복을 함으로써 이몽학을 속이면서 시간을 끌었고, 인근의 의병과 근처에 있는 관찰사들이 홍주성의 포위를 풀었다. 이몽학은 밤중에 청양으로 탈출하였으나, 끝내 부하들의 손에 목이 잘려 살해당하고 부하들은 의병들과 관찰사들한테 이몽학의 목을 바쳐 항복하면서 그렇게 반란이 종결되었다. 그 당시 조정은 충청병사 이시언이 이끈 군대가 자꾸 이몽학에 의해 무너지자, 전라도는 물론 경상도에서도 진압군을 동원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참고로 그 중의 한 명이 바로 의병장 [[김덕령]]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